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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체호프 단편선]을 읽고(책리뷰/독후감/미녀, 거울, 내기, 티푸스, 주교)/안톤 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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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체호프 단편선]을 읽고(책리뷰/독후감/미녀, 거울, 내기, 티푸스, 주교)/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안톤 체호프)

<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눈에 아름답고 어여뻐 입이 쩍 벌어지고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가 있는 반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미녀라고 평가되기는 어려우나 가진 매력과 조화로 미녀라고 느껴지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이며, 사람들이 미녀를 바라볼 때 묘한 슬픔을 같이 느끼게 되는데 이는 아름다움 또한 한 때, 그 시절의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 그것의 광채가 시들고 덜하여짐에 대한 애수일 수도 있고 그 아름다운 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데 대한 비탄과 절망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싶을 만큼 아름 다운 것은 내 손에 움켜쥐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에 그 아름답고 고결하고 어여쁜 것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 가질 수 없으니 더 가지고 싶은 것이 되어 슬프고 애달고 분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것이 소설 속 아르메니아인 미녀에 대한 소회입니다. 반면 살짝 다른 시선으로, 나만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평범해 보이는 것이 비범해 보이고, 일상적인 것이 특별한 것이 되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이 매력적으로 빛이 발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이렇게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면 놓칠세라, 가지지 못할까 봐, 훨훨 날아가버릴까 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까 봐, 남이 잽싸게 낚아채 갈까 봐 두려워하지 않고 매 순간, 시시각각 아름답고 찬란한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 앞에는 <미녀>가 서 있었다. 번개를 한번 보면 알듯 나는 그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화가라면 이 아르메니아 소녀의 아름다움을 고전적인 엄격미라고 했을 터였다. 그것은 찬찬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당신이 어떤 완벽한 형상을 복 있다는 확신을 갖게끔 만드는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어쩌면 나의 슬픔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관조할 때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켜지는 특별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러시아적인 얼굴이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완벽한 외모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만약에 이 아가씨에게 그 들창코 대신에 아르메니아 소녀와 같은 오뚝하고 조형적으로 완벽한 코를 붙여놓는다면 그 얼굴은 아마도 원래의 매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는 이 아가씨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치 온몸으로 인정하고 느끼는 듯했다. 일찌감치 노쇠해진 데다 개기름이 흐르는 흉한 얼굴을 한 그에게 있어서 보통 사람의 행복이나 여행객의 행복 같은 것은 마치 저 하늘처럼 먼 곳에 있을 터였다. 

 

<거울> 속에 등장하는 장군 나리의 젊고 예쁜 딸 넬리는 결혼 후의 미래에 대해서 꿈을 꿉니다. 넬리는 꿈속에서 남편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인근 마을의 의사 스테판 루키치의 집을 찾아가 아픈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갈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의사 스테판 루키치는 전염병지역에서 진료를 마치고 막 돌아와서 너무 지치고 힘이 들어서 도저히 따라나서지 못하니 조금 더 먼 지역의 다른 의사를 찾아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넬리는 당신은 의사인데 너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 자신만 생각한다며 몰아붙이면서 자신이 남편이 전염병인 티푸스에 걸려 죽어가고 있으니 당장 함께 가달라고 읍소하고 실랑이를 거듭합니다. 이에 스테판은 하는 수 없이 마차를 타고 넬리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고 넬리가 남편 방으로 들어가 상태를 점검하는 틈에 거실 의자에서 고열에 시달리고 숨을 헐떡이고 헛소리를 하다 죽어버립니다. 스테판 또한 티푸스에 전염되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넬리는 남편이 먼저 죽은 후 그녀 홀로 떠안아야 할 일들에 대해서 절망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갑자기 바닥으로 뭔가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그것은 그녀가 꿈을 꾸기 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탁자 위에 하나 더 놓여 있었던 거울이었습니다.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매개체입니다. 형상이 반대로 비추어지지만 마주 서서 바라보고 있는 본인은 정작 전환되어 있는 거울에 비친 '상'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넬리는 스테판에게 이기적이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않은 매정하고 야멸찬 인간이라고 비난하지만 자신 또한 자신의 안위에만 매몰되어 다른 이들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 없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이기심 때문에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한 의사는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런 중에도 넬리 자신은 마땅히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고 평안하고 조금의 어려움도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고귀한 존재이며, 본인을 둘러싼 이들은 응당 나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소명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위 고위층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편협성과 나르시시트적인 자기애, 공감능력 없는 사고, 특권의식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그녀의 죽은 남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묻는다. 그러자 남편과 지냈던 이전의 모든 생활은 단지 이 죽음에 대한 어리석고 불필요한 서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티푸스>는 <거울>이라는 작품과 주제 및 내용, 소재면에서 결을 같이하는 소설입니다. 젊은 중위 클리모프는 티푸스에 걸려 죽어갑니다. 며칠 생사를 오락가락하다가 눈을 떠보니 여동생 카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클리모프)에게서 티푸스가 전염됐어. 그래서... 그래서 죽었단다. 장례를 치른 지 삼 일째야.
이 무시무시한 뜻밖의 소식은 클리모프의 의식 속으로 온전히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아무리 무섭고 강력한 것일지라도 회복기의 중위를 가득 채우고 잇는 동물적인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는 울며 웃었고, 이내 먹은 것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기 시작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 클리모프는 자신이 퍼트린 티푸스에 전염되어 사랑하는 누이동생이 앓다 죽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되지만, 자신이 죽음의 언덕에 떨어지지 않고 다시 기어 올라와 살아 있다는 그 기쁨이 누이동생의 죽음에 대한 비탄과 절망감에도 채 사그라지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좌지우지해 앓는 동안 곡기를 끊어 허기를 느껴 먹을 것을 내놓으라는 외침까지 자아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인간이기에 두려움과 고통, 절망 앞에서 한없이 자신의 사사로운 이득을 셈하고, 타진하고자 하는 이기심을 가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며, 이것이 때로는 수치심마저도 내동댕이칠 수 있고 지고지순한 사랑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을 수 있는 나약한 인간 본성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는 듯합니다.

 난 왜 이리 불행한가!
그리하여 그의 기쁨은 일상의 권태와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기쁨은 순간이며 또다시 반복되는 고달프고 희망이 없는 일상과 대면하고, 자신의 몸이 전염병균의 매계체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다르게 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과 상실감이 서서히 내면을 장악하면서 이 또한 부질없음을 느끼며 끝도 없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사람은 혼자서 고립되어 살 수 없으며 교류하고 소통하고 나누어야 생기 있고 권태롭지 않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임을, 그래서 나 혼자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심과 교만함, 교활함을 품은 채 살아간다면 불행은 어김없이 뒤따라올 수밖에 없음을 말하여 주는 듯합니다.

 

<주교>는 안톤 체호프가 죽기 직전에 발표한 작품으로 문화적 지도자로 느꼈던 부담감과 쓸쓸함, 외로움과 고통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주교의 고뇌와 죽음을 통해 담아낸 자전적인 소설입니다. 

표트르 주교는 자신의 마음과 철학과 달리 교인들이 자신을 두려움과 경외감을 대상으로 여겨 어려워하고 심지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 한편에 늘 불편한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어느 날 늙은 수도사 시소이 신부와 표트르 주교의 생모 마리야 티모페네브 나와 조카가 마을에 나타납니다. 마을 사람들은 시소이 신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그와 면담을 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거나 그들의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등 잦은 교류를 이어갑니다. 어머니 마리야 또한 아들로서 보다는 주교로서 그를 대하는 것에 대해 냉담함과 서운함을 느낍니다. 이에 표트르 주교는 시소이 신부에게 묘한 질투심과 불편함을 느끼고, 어머니는 가까이하고 싶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가깝고도 먼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러던 중 표트르 주교는 큰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고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죽은 후 얼마간은 사람들이 추모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 세상과 예초에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듯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작가인 자신도 표트르 주교와 같이 살아있을 때는 자신의 사상과 문장을 가르침 받기 위해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경외심을 품고 눈밖에 날까 두려움에 떨고 그의 칭찬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사람들이 그를 따르겠지만, 죽은 후에는 쥘 수도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강물의 흐름과 같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에 대한 기억은 차츰 흐려지고 희미해지다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허망함과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이사 간 곳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신실하고 훌륭한 주교였다는 사실을 알리며 그를 마음 깊이 기리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살기 위해 살아가고,  그가 생전에 홀로 외롭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저 쓰기 위해 썼던 글들을 읽기 위해 읽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며, 이 글들이 후세에 길이 남아 전해진다면 작가의 모든 작업이 그저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작가의 죽음 또한 육체적으로는 살이 썩고 뼈만 남아 그것 또한 수천수만 년이 흐른 후에 흙에 섞이고 버리지만 영혼은 권위와 요구, 기대, 최고의 것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새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이니 죽음 또한 두려워하고 피해야만 할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나의 의지에 관계없이 태어났고 또한 나의 의지에 반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모두가 물이 흐르고, 산이 솟고, 숲을 이루고, 하늘의 구름이 모양을 달리하는 모든 것과 같이 자연의 이치이며 우주의 섭리일 것이기에 결코 오만하지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표트르 주교)는 마을신부에나 어울려요. 아니면 보제든가 아니면 평수도사든가... 모든 일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짓누르고 있어요.
그는 소박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간 자신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즐겁게 들판을 뛰어가고 있고 머리 위로는 햇빛 가득한 넓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광경을 눈에 그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새처럼 자유로우며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한 달 뒤에 새 대리주교가 임명되었으며 그때는 이미 아무도 표트르 예하에 대한 생각을 하지 ㅇ낳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완전히 그를 잊어버렸다.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존경받던 주교였지만 죽은 뒤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순식간에 잊혀 버린다. 그리고 주교의 삶과 죽음 따위는 당초부터 이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남아있는 자들의 삶도 예전처럼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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