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싯다르타]를 읽고(책리뷰/독후감)/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는 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은 사람, 사는 게 무엇인지 의구심이 드는 사람, 나는 살 가치가 있는가, 죽어 마땅한 것 아닌가, 죽어야 이 무거운 짐을 내리고 평안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 매사가 허망하고 덧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책 탑 5안에 들만큼 나의 마음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살아가는 것, 살아있는 것에 대한 나의 시각과 본질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해 준 소설입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재주며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그것, 즉 명상하고 기다리고 단식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만물을 사랑할 수 있고, 그것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게 하여, 완전한 것 그리고 완성을 의미하는 '옴'이라는 소리를 낼 수 있으며, 옴의 소리를 듣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내가 너이고, 내가 강물이고, 내가 산이고, 내가 바다이고, 내가 하늘일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스승이요 나를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이 모두 나와 같으니, 그 세상이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와 같기에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존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아끼고 보살피지 않을 수 없으며 자비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장사꾼 카마스와미에게 싯다르타가 제가 가진 재주는 단식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깨닫지 못하는 새에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먹을 것을 그리도 탐하던 나였는데, 소위 먹고 토하는 '먹토'를 하던 나였는데, 음식물을 씹어 그 맛만 느끼고 봉지에 뱉어내던 나였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울면서 뛰고 또 뛰었던 나였는데, 먹다 지쳐 이도 닦지 않은 채 잠들 던 나였는데, 치아가 삭아내리던 나였는데, 어느새 먹을 것에 둔감해지고, 아까워지고, 낭비라고 생각되고, 나를 병들게 한다고 생각해졌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어느 틈인가 나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내가 먹고 또 먹고, 토하고 부대끼고, 아파보고, 달려보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견고하고 확고하게 식습관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은 어떤 음식도 남김없이 그릇을 비웁니다. 스님이 발우공양을 하듯 그릇에 양념까지도 박박 긁고 훑어 먹습니다. 음식의 양 또한 영양의 밸런스를 맞추어 최소한의 양만을 섭취하게 되고, 남긴 음식들을 해치웁니다. 필요한 만큼만 먹으니 당연히 몸에 살은 깎이고, 몸은 가볍고 정신은 맑아집니다. 남기지 않으니 쓰레기가 없어지고, 버려지지 않으니 깨끗합니다. 남과 나누니 기쁨이 배가 됩니다.
싯다르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싯다르타는 존경받고 학식이 높은 계급으로 늘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칭찬을 독차지하였습니다. 늘 구도하는 삶을 살며 침잠수련을 통해 내면의 자아를 찾고자 하였으며 제사를 지내고, 학식이 깊고 지식이 많은 아버지를 비롯한 선생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일상을 당연한 듯 거부감 없이 따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떠돌아다니며 구도를 하는 사문들의 모습을 보며 싯다르타는 깨닫게 됩니다. 지식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혜는 스스로 자기 내면과 자아에 의해서 깨우쳐야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결정을 선뜻 허락할 수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몇 날 밤을 그 자세 그대로 허락을 구하고, 아버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환하게 빛을 바라고 있으며 눈은 선명하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압도되어 아들이 떠돌이 사문생활을 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고빈다와 함께 사문생활을 하던 중 세존 고타마를 만나게 되는데, 고타마와의 대화를 하며 그는 고타마의 교리에 따르며 그에 귀의하는 것을 포기하고 직접 체험을 통해 습득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 세속적인 삶 속으로 뛰어듭니다. 싯다르타의 친구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친구이지만, 싯다르타의 이번 결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빈다는 고타마에 귀의하며 두 사람은 기약 없는 이별을 합니다. 결정을 내리고 강물 앞에서 뱃사공 한 명을 만나게 됩니다. 뱃사공은 흔쾌히 싯다르타를 배에 태워 강물 건너편으로 실어줍니다. 싯다르타는 뱃삯으로 입고 입는 옷을 내어주었고, 뱃사공은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집니다. 싯다르타는 숲 속을 걷던 중 카말라라는 기생의 정원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녀에게 구애합니다. 카말라는 허름한 옷차림과 먼지를 둘러쓴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보며 자신과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부와 재력, 권력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싯다르타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장사꾼을 찾아가 장사를 배워 큰돈을 벌게 되었고, 카말라와도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풍족해진 싯다르타는 노름판에 기웃대며 노름을 하게 되고, 크게 돈을 따기도 잃기도 합니다. 술판을 벌여 술에 절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며 점점 세속적인 생활에 대한 염증과 덧없음, 허망함을 느끼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강물 앞에 다시 섭니다. 이렇게 더럽고, 추잡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낭비하고, 탐욕적인 죄인인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강물에 몸을 던지려 하던 순간, 강물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보며 시간이 부존재, 모든 사물의 일원화를 깨닫게 되며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구합니다. 강가에 쓰러져 오랜 시간 잠에 빠져 들었다 눈을 뜬 싯다르타의 눈앞에 오래전 헤어진 친구 고빈다를 만나게 됩니다.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가 뱀이 출몰하고 강물이 덮칠 수 있는 위험한 곳에 잠들어 있어 그의 안위를 위해 다른 사문들을 앞세우고 그를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둘은 다시금 기약 없는 이별을 합니다.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찾아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고, 그녀를 떠납니다. 카말라는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가 떠난 후 그녀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예전에 만났었던 뱃사공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뱃사공이 되고 싶다고 청합니다. 뱃사공은 그저 미소로 싯다르타를 자신의 오두막에 들이고, 그와 함께 뱃사공을 하면서 강물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갑니다. 카말라는 싯다르타가 떠난 후 고타마에 귀의해서 그녀의 아들과 떠돌던 중 싯다르타가 뱃사공으로 일하고 있는 강가에 당도하는데,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뱀에 물려 허망하게 죽고 맙니다. 카말라의 죽음을 목도한 싯다르타는 카말라는 죽었지만, 그녀가 남긴 선물 즉 아들을 얻게 됨에 크게 기뻐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애지중지 키워져 사리분별하지 못하고, 매사에 때를 쓰고, 부모에 대한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며 온갖 나쁜 짓을 해댑니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아들이 다칠까 아플까 고통스러울까 전전긍긍하며 아들의 곁을 지킵니다. 뱃사공은 아들을 진정한 스승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출가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싯다르타는 쉽게 아들을 놓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싯다르타는 자신이 부모님을 떠나 출가하던 때를 상기하며, 아들도 스스로 구도의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 순리임을 깨닫고 아들을 떠나보내기로 합니다. 싯다르타는 뱃사공과의 생활을 통해 비로소' 영원한 것', '완성'을 뜻하는 '옴'을 내뱉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어내고,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모든 사물이 하나라는 것을 강물의 이야기를 통해 깨우치게 됩니다. 뱃사공은 싯다르타를 떠나 자연으로 떠나고, 뱃사공이 떠난 오두막을 지키며 뱃사공으로 늙어갑니다. 그런 그의 앞에 세존 고타마가 다시 나타났고, 싯다르타는 말로 전달되는 지식보다는 사물을 통해 직접 체득한 지혜가 소중함을 고하면서 그에게는 학식과 지체가 낮은 수많은 스승이 때로는 뱃사공으로 때로는 기생으로 때로는 장사꾼으로 때로는 노름꾼으로 때로는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노라고 말합니다.
모든 고뇌와 번뇌는 불안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비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싯다르타 앞에서 한 목표, 오직 하나뿐인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멸각(멸각) 시키는 것, 자아로부터 벗어나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닌 상태로 되는 것, 마음을 텅 비운 상태에서 평정함을 얻는 것, 자기를 초탈하는 사색을 하는 가운데 경이로움에 마음을 열어놓는 것, 이것이 그의 목표였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쾌락을 얻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남과 비교하고 더 가지지 못해 허탈하고, 더 가지지 못해 허망하고, 더 가지지 못해 의욕을 잃고, 더 가지기 위해 탐욕스럽고, 교활하고, 사악하고 형편없이 썩어빠지게 됩니다. 비워야 무엇이든 채울 수 있으니, 더 비워낼수록 깨끗이 정화될수록 얻게 되는 깨달음이 용솟음치고, 기쁨이 넘실대는 바람 속에서, 열반의 황홀하고 근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현생을 중시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극락이며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은 사랑스럽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간섭과 판단-그것이 자신이 낳은 자녀라 할지라도-을 내리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해서만, 오로지 나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고, 오로지 나에 대해서만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제 기준에 정의롭지 않고 악한 것이라고 한다면 오로지 나 자신에 의지에 의해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누구나 부러워하고, 인정하고, 칭찬하는 삶을 살다 출가를 결심합니다. 이 결정을 내린 딱 한 가지 이유를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안주하고, 타협하고, 머무르고자 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지식을 제아무리 많이 습득한다 해도, 스스로 체득하여 뒹굴고 쓰러지고 다치고 피 흘리며 배워 얻은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대는 그렇게 하고자 하였소. 이보세요, 카말라, 만약 그대로 돌멩이 하나를 물속에 던지면, 그 돌멩이는 곧장 그 물아래 밑바닥에 가라앉게 되겠지요. 싯다르타가 하나의 목표, 하나의 계획을 세우면 바로 그렇게 되지요. 싯다르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아요. 그는 기다리고, 그는 사색하고, 그는 단식을 할 뿐이지요. 그러나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몸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마치 물속을 뚫고 내려가는 그 돌멩이처럼, 세상만사를 뚫고 헤쳐나가지요. 그는 이끌려가면 이끌려가는 대로,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놔두지요. 그의 목적이 그를 끌어 잡아당기지요. 왜냐하면, 그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자기 영혼 속에 들여보내지 않기 때문이오.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사문들한테 배운 것이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것을 마귀들이 부린 조화라고 말들 하지요. 아무것도 마귀들이 조화를 부려 생겨나는 것은 없지요. 누구나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안다면, 마술을 부릴 수 있으며, 자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소.
돌멩이 하나를 강물에 던지면 돌멩이를 던진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우주의 섭리로 아래로 곧장 가라앉듯이 그저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안다면 세상 사람들이 마술 혹은 마귀들이 조화를 부리는 일들은 일어나고, 내가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우는 대로 그대로 됩니다. 그것은 결코 마술도, 마귀들이 부르니는 조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이고, 강물에 던져진 돌멩이가 가라앉듯, 나비가 꽃잎을 찾아 날아다니듯, 폭포가 아래로 떨어지듯, 줄기와 잎이 해를 향해 뻗어가듯 때가 되면 당연히 일어나야 하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순리입니다. 강물은 늘 흐르고 있지만, 강물은 늘 그 자리에 있고,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어귀에서나, 목표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강물을 통해 배우게 되면 인생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소녀였던 나, 중장년층인 나, 노년층일 나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줄기 강물에서 그림자에 의해요 분리되었을 뿐, 모두 한줄기 강물 그 자체, 모두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 따라서 과거도, 미래도, 생과 사도 모두 다 같은 것,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듯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될 수 있습니다.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꺠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어. 내가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나의 내면에서 다시 아트만을 발견해 내기 위해서였어. 내가 죄를 저지르니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였어. 앞으로 나의 길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까? 그 길은 괴상하게 나 있을 테지, 어쩌면 그 길은 꼬불꼬불한 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길은 원형의 순환 도로일지로 모르지. 나고 싶은 대로 나 있으라지. 그 길이 어떻게 나 있든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가야지.
싯다르타는 속세의 금전, 권력, 쾌락의 달콤함에 길들여져 점점 해탈, 열반, 구도, 아트만과 멀어졌고, 덧없고 허망하고 허탈함에 정신과 마음이 병들어 결국 자살이라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속세의 금전, 권력, 쾌락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스승과 부모를 통해 배워 모두 알고 있었지만, 몸소 체험하고 나니 두 눈으로 두 손으로 두 발로 가슴으로 머리로 몸으로 깨우쳐 이제 그것을 진실로 알게 된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아들만은 자신과 같은 고통과 고난을 겪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죽음을 생각했을 만큼 괴롭고 고되고 힘겨웠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싯다르타가 카말라와 이별을 고할 때, 그녀는 싯다르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틈새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욕망과 번뇌가 스며들어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중에도 몰입할 수 없으며, 그녀와의 사이에는 늘 어느 만큼 의 간격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에게만은 어떠한 틈새의 번뇌도 침투할 수 없는 진공의 상태로 온전한 사랑의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아들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같은 것, 같은 종류라는 인식 때문에 그가 괴롭고 번뇌하고 고통스럽고 넘어져 피 흘리는 그런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이때 뱃사공 바주데바는 아이에게 올바른 길을 가라고, 올바르지 못한 일은 하지 말도록 하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는 강요받고 있다고 느끼고, 벌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번뇌와 고통, 환멸이 면제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그 아이를 대신해서 아비가 대신 고통받고 죽어준다고 해도 그것이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도 덜어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싯다르타 자신이 그랬든 그 아이도 스스로 장사꾼도 되어보고, 뱃사공도 되어보고, 술도 마시고, 색도 취하면서, 장사꾼을 스승으로, 뱃사공을 스승으로, 기생을 스승으로, 도박꾼을 스승으로 삼아 진정한 극락왕생, 열반, 해탈, 아트만의 경지에 다달아야 한다는 것을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느냐며, 위로하고 공감해 주었고, 싯다르타는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냅니다.
싯다르타는 노인이 되어 죽음을 앞두고 다시금 세존 고타마를 만납니다. 모든 진리는 그 반대로 마찬가지로 진리라는 것, 양면성을 모두 가진 이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일면적 측면에서 바라볼 때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 있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우쳤음을 고백합니다. 선과 악,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을 나눌 수 없으며 모든 것에는 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 또한 선 혹은 악, 한 가지로만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악하기도, 선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이미 완성되어 있으며,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배웁니다. 바주데바는 스승도 없고 책도 없지만 그는 평생 강물을 믿었고 그 사물들과 자신이 동류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 사물들을 그토록 사랑스럽게 여길 수 있었고, 그토록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었으니, 그가 싯다르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선과 악이 극명해 보이는 현실에서, 그 모든 것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속세의 인간들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저지르는, 다른 이들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흉폭하게 빼앗고 갈취하고 폭력으로 군림하려 하는 자도 나와 우리와 동류의 존재인가! 그리하여 사랑해야 하는가, 숭배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이 구석으로 몰리고 악에 의해 지배당하는 저이들이 얼마나 가엾은가, 잘못을 깨우치지 못하고 극악무도하게 다른 이들을 구둣발로 짓밟고 호가호의 하는 자들이 풀어야 할 업보는 얼마나 태산과도 같을까, 성철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밥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밥에게 <먹히는> 인간이 되어 성스러움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비루먹은 개가 되어 살아가는 자에게 자비라도 베푸는 것이 성인의 자세가 아닐까 하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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