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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어떻게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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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어떻게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나?

1. 스티브 잡스,  IT 업계에서는 아이돌과 같은 존재

 

세계적인 회사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를 열었고 아이폰으로 전 세계인의 삶을 바꿔놓은 인물로 혁신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미국에서 에디슨, 헨리 포드와 같은 미국 발전의 혁신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그가 대학 중퇴 후 창업으로 성공 신화를 이룩한 모습을 보며 이후 미국의 청년들 사이에서 학교를 중퇴한 후 창업하는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스티브 잡스는 IT 업계에서는 아이돌과 같은 존재이며 그가 만든 제품이 출시되면 그것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오픈런을 하고 줄을 서서 오랜 시간 기다림도 감수했습니다.

한 기업 CEO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며 그만큼 영향력이 엄청나게 컸던 이례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성공한 CEO, 위대한 혁신가의 모습이 전부였을까요?

그와 가까웠던 주변인들은 잡스에 대한 또 다른 모습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과연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2. 스티브 잡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당신은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스티브 잡스의 주변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고 그들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세상은 스티브 잡스를 두 버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가 무자비하며 사람들을 나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직원들을 아무 이유 없이 해고한다거나 어쩜 인간이 저런 짓을 할 수 있지? 이런 반응이 나올 짓을 한 거겠죠. 왜 저러는 거야... 꼭 저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제 자식은 절대 저렇게 안 키워야겠다고 다짐했고요.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많은 사람들은 비열하게 회사를 운영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스티브 잡스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죠
< 기업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게리 베이너척>

 

잡스는 기만적이고 진실을 왜곡하는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이다
< 스티브 잡스의 일부 학교 동창들>
잡스의 무모한 행동이 애플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
<미 경제 잡지 포츈지의 내용 中>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외골수이고 괴짜스러운 성격 때문에 골칫덩어리로 낙인찍히며 결국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퇴출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이러한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딛고 혁신을 이뤄낸 것일까요?

3. 스티브 잡스의 어린 시절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모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잔달리&#44; 조엔 시블(스티브 잡스의 친부와 친모)
잔달리, 조엔 시블(스티브 잡스의 친부와 친모)

친모인 조앤 시블은 대학에서 언어치료학을 공부했고 친부 잔달리는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는 시리아 출신 엘리트였습니다.

두 사람은 학교를 다니 던 중 사랑에 빠져 잡스를 갖게 됐지만 종교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조앤의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합니다.

당시는 현재보다 더 미혼모에 대한 인식이나 여건이 안 좋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임신한 조앤은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고, 결국 조앤은 부모님 몰래 출산한 후 아이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이때 조앤의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선 이가 바로 잡스 부부였습니다.

사실 잡스의 친모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서 대학교를 졸업한 부부에게만 아이를 보내겠다고 생각하고 그에 합당한 양부모를 찾아 나섰지만, 그 조건에 맞는 양부모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고 결국 기계공과 경리로 일하며 대학 문턱에서 간 적이 없는 잡스 부부가 아이를 입양하게 됩니다.

잡스 부부는 아이를 반드시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했고, 친모는 잡스 부부에게 아이를 보냅니다.

입양된 잡스는 양부모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개방적이었던 잡스의 양부모는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닐곱 살 때쯤 이웃집 아이가 '그럼 친부모님이 너를 버린 거네!'라는 말을 듣고 당시 어린 잡스는 눈물을 쏟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양부모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 우리가 너를 특별히 선택한 거란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천천히 반복해서 말해주셨어요. 단어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가면서 말이죠. 

 

이후 스티브 잡스는 선택받은 특별한 아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안정을 되찾았고 훗날 양부모님이 자신의 진짜 1,000% 부모님이었다고 양부모님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잡스는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님에 대해서는 어떠한 애정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의 친부모님은 나의 정자와 난자 은행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양부모들은 생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잡스의 교육에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양부 &#39;폴 라인홀트 잡스&#39;
스티브 잡스의 양부 '폴 라인홀트 잡스'

양아버지 폴 잡스는 전기와 기계에 박식했고 움직이지 않는 50달러짜리 고물 차를 사서 고친 후 250달러에 파는 일을 했던 대단한 기술자였습니다.

덕분에 잡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기계를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됩니다.

양부는 잡스가 기계에 관심을 보이자 자신의 작업대를 분리해서 잡스만의 공간을 마련해주기까지 했습니다.

잡스는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완벽주의를 평생의 지침이자 신념으로 삼게 됩니다.

게다가 초등학생 잡스는 학교에서도 굉장히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잡스의 비범함에 수학능력 평가시험을 치렀는데 잡스의 수학 능력이 무려 11학년,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등학교 2학년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잡스의 학교는 4학년을 마치면 두 학년을 건너뛰고 중학교에 입학할 것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잡스의 양부모는 혹시라도 잡스가 적응을 못할까 염려해 한 학년만 월반을 하게 됩니다.

잡스는 어릴 때 항상 우등생이었을까요?

훗난 잡스 본인이 어린 시절의 모습을 기억해 남긴 말이 있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학교 공부가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결국 말썽이나 피우는 데 몰두하게 되었지요

 

입학 전부터 독서를 통해 글자를 익히고 다양한 지식을 얻었던 잡스는 학교 수업이 매우 지루했습니다.

잡스는 숙제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키우던 강아지와 고양이 등  반려동물들을 학교에 데려오는 바람에 놀란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수라장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잡스는 친구들의 자전거 자물쇠 비밀번호를 알아낸 다음, 모든 자물쇠 비밀번호를 바꿔버리기까지 해서 친구들을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기도 하며 그날 밤이 다되도록 집에 가지 못한 친구들이 자전거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잡스는 중학교에 입학하자 크게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잡스가 다니던 크리텐든 중학교는 험악한 분위기로 정평이 자자했었고 싸움은 일상적이었으며 잭나이프와 같은 무기까지 들고 다니는 불량 학생들이 수두룩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잡스는 결국 양부모님께 '이 학교에 계속해서 다니게 되면 자신의 인생은 실패할 것 같다'며 이사를 가자고 졸랐고 잡스 가족은 결국 전학을 위해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 첨단 산업의 중심으로 불리는 '실리콘 밸리'입니다.

실리콘 밸리는 샌프란시스코 남부에 위치한 첨단 산업 단지 지역으로 애플, 구글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다수 위치해 있습니다.

훗날 잡스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매우 운이 좋았습니다. 저는 폴이라는 이름을 가진 놀라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저는 실리콘 밸리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곳엔 엔지니어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래리 랭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는 저에게 많은 전자공학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대단했어요. 그 장소(실리콘 밸리)와 그 시대에 정확히 바로 내가 있었던 것은 놀라운 행운입니다.

 

잡스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실리콘 밸리를 꼽았을 정도로 그곳에서의 생활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아직 실리콘 밸리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이었고, 그곳은 농업 중심의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HP사 창업자 윌리엄 빌 휴렛&#44; 데이비드 패커드
HP사 창업자 윌리엄 빌 휴렛, 데이비드 패커드

1939년 이 지역 벤처기업 1호인 HP(휴렛 패커드)사를 시작으로 벤처기업들이 들어오면서 샌프란시스코 주변은 IT 산업이라는 제2의 골드러시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처럼 잡스는 첨단기술과 젊은 엔지니어들이 몰려들었던 실리콘밸리에서 호기심 많은 10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4. 스티브 잡스, 히피 문화에 심취하다

당시 잡스는 미국을 휩쓴  히피 문화에 깊이 심취하며 학창 시절 내내 이 문화에 빠져 지내게 됩니다.

히피 문화란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기성 사회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반문화 운동을 말하며, 평화, 사랑, 자유를 추구했습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 피살&#44; 1968년 마틴 루터 킹 피살
1963년 케네디 대통령 피살, 1968년 마틴 루터 킹 피살

1960년대 미국사회는 냉전 시대에 접어들며 혼란스러웠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케네디 대통령과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잇다라 피살당했고 게다가 미국이 베트남전까지 참전하면서 청년들은 미국 사회가 단단히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에 히피 문화는 사회를 주도하는 주류 문화를 정면으로 거부하며 시작되었고 히피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히피들의 성지로 떠올랐던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였습니다. 

히피 문화에 빠진 스티브 잡스
히피 문화에 빠진 스티브 잡스

히피에 심취한 잡스는 당시 히피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장발을 고수했으며 자유와 평화를 담은 밥딜런과 비틀스 노래를 즐겨 들었습니다.

특히 잡스는 밥 딜런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비공식 녹음테이프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히피 문화는 잡스에게 외모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눈을 뜨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잡스의 일탈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잡스는 히피 문화에 심취해 있던 15살 무렵부터 마약을 즐겼습니다.

당시 히피들은 내면의 의식을 일깨운다는 명목으로 마약을 즐겼고 때문에 히피 문화를 추종했던 잡스도 친구들과 모여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는 고3 때에는 수면부족의 환각을 탐험하기 위해 며칠밤을 새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시 가장 강한 향정신성의약품의 일종인 강력한 환각제 'LSD'까지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5. 17세의 스티브 잡스 대학교를 자퇴하다 

하지만 잡스는 이 시기 최소한의 학업만 이어 간 와중에도 예술과 인문학으로 유명한 '리드대학교'에 합격합니다.

이렇게 1972년 17세의 나이에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잡스는 처음에는 특정한 학과를 전공하지 않고 인문학, 심리학, 철학 등 다양한 수업을 듣게 되는데 특히 히피의 영향으로 동양철학에 빠지게 됩니다.

이후 대학생활은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으로 등록금을 낼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한 학기만을 마치고 자퇴를 합니다.

6. 19세의 스티스 잡스, 첫 직장 '아타리'에 입사하다 

스티브 잡스가 제출한 인생 첫 이력서
스티브 잡스가 제출한 인생 첫 이력서

그는 중퇴 후 취직을 위해 이력서를 작성하는데 훗날 이 이력서는 2021년 7월 경매에서 34만 3천 달러, 현재 가지로 약 4억 원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73년 18세에 작성한 스티브 잡스의 이력서에는 이미 자퇴했지만 주소를 리드 대학으로 전공도 없었지만 영문학으로 적었으며 내용 또한 빈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 관련 디자인과 전자공학 또는 디자인 엔지니어를 자신의 특기로 적은 부분이 눈에 띕니다.

이때는 안타깝게도 취직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구인공고를 보던 중 '즐기면서 돈 버세요!라는 게임회사의 공고문을 보고는 솔깃하게 됩니다.

비디오 게임의 선구자 &#39;아타리&#39;
비디오 게임의 선구자 '아타리'

그래서 무작정 광고에 나온 회사를 찾아가 인사 담당자를 만났고, 그 회사가 비디오 게임의 선구자였던 '아타리'입니다.

누가 봐도 히피 문화에 빠져있는 잡스의 모습을 보고 인사 담당자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잡스는 일자리를 주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회사 로비에서 버텼다고 합니다.

아타리 창업자 놀란 부쉬넬
아타리 창업자 놀란 부쉬넬

이런 잡스의 모습을 우연히 본 아타리 창업자인 '부쉬넬'은 그를 합격시켜 주었고, 그렇게 잡스는 당시 전도유망한 게임회사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7. 스티브 잡스, 첫 직장 아타리에서 잘 씻지 않아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동료들의 미움을 사다

잡스의 첫 번째 회사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회사 동료들이 그를 싫어했던 이유는 바로 그가 잘 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히피의 영향으로 채식에 빠져있었고 채식을 하게 되면 몸을 깨끗하게 하고 해로운 채취를 막아주기 때문에 자 씻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들은 냄새나는 잡스를 좋아하지 않았고 회사 내에서는 그를 해고하라는 민원이 빗발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잡스를 합격시켰던 부쉬넬이 해고하는 대신에 그를 다른 직원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야간 근무직으로 돌려서 사태를 무마합니다.

부쉬넬은 잡스가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모두가 2~3개월 걸린다고 한 프로젝트를 잡스는 일주일이면 할 수 있다고 하는 등 잡스의 특이한 모습이 흥미를 느꼈고 그런 모습 높이 산 것으로 보입니다.

8. 스티브 잡스, 친구 '워즈니악'의 도움으로 1인용 게임 벽돌 깨기를 만들어 회사에서 인정받다

회사에서 눈칫밥만 먹던 잡스에게 드디어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혼자서 즐길 수 있는 1인용 게임을 만들어 보라는 미션이 주어진 것입니다.

스티브 워즈니악
스티브 워즈니악

이때 잡스는 훗날 애플의 공동 창업자가 되는 '스티브 워즈니악'을 찾아갑니다.

잡스와 워즈니악은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 살던 워즈니악은 컴퓨터를 혼자 설계하고 완성 낼 수 있을 만큼 컴퓨터 전문가였고 친구의 소개로 16살의 스티브 잡스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줄곧 인연을 이어옵니다.

잡스는 워즈니악이 첨단 기술인 컴퓨터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고 혼자 뚝딱 조립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잡스는 컴퓨터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워즈니악과의 인연으로 컴퓨터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준전문가 수준의 기술을 습득하게 됩니다.

잡스는 워즈니악을 찾아가 보통 게임 제작 기간이 2~3개월 정도 걸렸는데 회사가 잡스에게 3일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며 워즈니악에게 1인용 게임을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고 합니다.

당시 워즈니악은 HP사의 정식직원이었고 직장 생활로 바쁘지만 잡스의 도움 요청에 밤을 새워서 3일 만에 게임을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39;벽돌깨기&#39; 게임
'벽돌깨기' 게임

이때 워즈니악이 만든 게임은 1인용 게임 분야를 선도하며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바로 '벽돌 깨기' 게임입니다.

벽돌을 탁구공으로 튕겨서 깨뜨리는 콘셉트의 이 게임의 원래 제목은 'Break Out'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벽돌 깨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이 게임은 아타리의 대표 게임이 되었고 잡스는 워즈니악의 도움으로 회사에서 인정받는 데 성공합니다.

잡스는 게임개발금으로 회사에서 5,000달러를 받게 되었는데, 워즈니악에게는 700달러밖에 못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 중 절반인 350달러를 워즈니악에게 줬으며 따로 받은 보상금은 혼자 꿀꺽했습니다.

9. 스티브 잡스, 워즈니악과 손잡고 애플을 창립하다 

각자 직장 생활을 이어가던 잡스와 워즈니악은 어떻게 애플을 함께 창업할 수 있었을까요? 

알테어 8800

두 사람을 자극한 것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알테어 8800'의 등장입니다.

알테어 8800보다 뛰어난 컴퓨터를 개발한 워즈니악
알테어 8800보다 뛰어난 컴퓨터를 개발한 워즈니악

컴퓨터 광이었던 워즈니악은 알테어 8800의 출시 소식을 듣고 그것보다 더 좋은 컴퓨터를 만들겠다고 열정을 불태웠고 마침내 1975년 6월, 전설의 발명품을 완성하게 됩니다.

사실 워즈니악은 컴퓨터를 팔면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개발한 컴퓨터를 무료로 나누려 했습니다.

하지만 잡스는 컴퓨터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봤고, 워즈니악에게 두 사람이 회사를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만들어 팔아보자고 제안합니다.

이때 잡스는 자신의 차를 판 돈 1,500달러와 함께 워즈니악을 찾아갔고 이런 열정에 감동한 워즈니악은 그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전자계산기를 판 돈 250달러를 더해 부모님의 차고지 한편에 사무실을 마련합니다.

이렇게 21살의 청년 스티브 잡스와 26살의 워즈니악이 설립한 회사가 바로 IT 기업 '애플'입니다.

10. 회사의 이름이 '애플'인 썰

게임 회사 아타리에 다니던 잡스는 아타리(Atari)보다 알파벳 순서로 나열한 전호번호부에서 먼저 나오기를 원해 애플(Apple)로 정했다는 썰이 있습니다.

애플의 첫 번째 로고
애플의 첫 번째 로고

또한 1976년 애플의 첫 번째 로고를 보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잡스는 컴퓨터계의 뉴턴이 되어보겠다는 의지를 담아지었다는 썰도 있습니다.

11. 스티브 잡스, 애플 I과 애플 II를 만들어 판매했으며 컴퓨터의 대중화에 성공하다

잡스는 회사를 설립한 후 워즈니악이 만든 컴퓨터에 '애플 I'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기업체가 아닌 가정에서 컴퓨터 사용은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컴퓨터에 관심 있는 특정 소비자를 제외하면 애플 I에 관심이 없었고 그 결과 판매가 된 애플 I 은 약 200대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잡스는 굴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돌입합니다.

판매량을 높이기 위해 특정 소비자가 아니라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사용하기 쉬운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애플 II
애플 II

이렇게 탄생한 컴퓨터가 1977년에 탄생한 애플 II이며 키보드와 본체가 합쳐진 개인용 일체형 컴퓨터입니다.

그리고 그래픽과 컬러 영상 출력을 지원했으며 오늘날 컴퓨터와 아주 흡사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잡스는 애플 II를 대중화하기 위해서 한 가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게임을 설치하는 것이었고 즐길거리를 탑재한 컴퓨터를 대중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12. 스티브 잡스,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로고를 바꾸고 가격을 낮추어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다

애플 II의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짰는데 바로 '로고'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의 첫 번째 로고와 두 번째 로고
애플의 첫 번째 로고와 두 번째 로고

잡스는 애플 II의

이때의 로고는 1977년부터 1998년까지 약 21년 동안 사용됩니다.

게임 설치와 로고 교체까지 하며 적극적으로 홍보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효과가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판매가격입니다.

당시 애플 II는 1,298달러에 팔렸는데 다른 컴퓨터들에 비하면 가격이 낮았습니다.

이렇게 잡스가 세운 여러 가지 판매 전략과 가성비까지 더해져서 애플 II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습니다.

애플 II의 성공으로 애플 창업 약 5년 만에 당시 자산평가액 약 200,005,600 달러, 현재 가치로 약 2조 850억 원을 기록했고, 이로서 잡스는 20대에 엄청난 거부로 거듭납니다.

13. 스티브 잡스, 창업 약 5년 만에 거부가 되다 

게다가 1980년 12월 12일 애플을 주식시장에 상장하게 됩니다.

상장 당일에 당시 금액 22달러로 시작한 주가가 장 마감할 때는 29달러까지 상승합니다.

액면분할이란 주식의 시작 가격이 과도하게 높은 경우 주식 거래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당 가격을 낮추는 것을 말하는데, 이후 애플은 상장 후 총 5차례에 거쳐 액면분할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애플 주식 초기 1주는 현재 약 224주의 가치였고 이를 추정치로 환산하면 약 5천5백만 원에 달했습니다.

14. 애플, 라이벌 'IBM'에 밀리며 위기에 처하다 

하지만 잡스는 이러한 성공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애플을 바짝 쫓아오는 라이벌이 등장한 것인데, 바로 세계 최대의 컴퓨터 업체인 IBM이었습니다.

당시 애플 II의 성공으로 개인용 컴퓨터 시장이 커지자 1981년 IBM은 5150을 출시했고 본격적으로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애플 II를 독자적인 시스템을 내세워 타사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와 호환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IBM  제품은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키보드, 모니터 등 주변 기기까지 타사 제품과 호환될 수 있도록 개발돼 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덕분에 출시 2년 만인 1983년 IBM 5150은 약 75만 대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이런 IBM의 성공을 지켜본 잡스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당시 잡스의 심경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잡스가 IBM상표 아래에서 손가락욕을 하고 있는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뉴욕 여행 중 찍은 사진
스티브 잡스가 뉴욕 여행 중 찍은 사진

사실 잡스는 IBM의 컴퓨터 출시 초반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IBM을 환영한다는 광고까지 냈습니다.

하지만 IBM에 밀려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2인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5. 스티브 잡스, 독단적인 성격 때문에 회사의 골칫덩이로 전락하다 

회사내부에서 IBM을 꺾을 수 있는 최고의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던 잡스가 위기를 맞게 됩니다.

독단적인 성격 때문에 팀원들을 숨도 못 쉬게 압박해 회사에서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잡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팀원에게는 거침없이 모욕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일이 다반사였고, 게다가 지독한 워커홀릭이어서 새벽 야간은 물론 주말 오전 7시에 팀 회의를 소집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이런 잡스의 스타일에 맞추기 위해 직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주 90시간을 근무하기 도 했습니다.

결국 회사는 고심 끝에 잡스가 맡고 있던 컴퓨터 제작 프로젝트를 그만둘 것을 통보했으나 잡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컴퓨터 개발의 꿈을 안고 팀만 옮겨 개발을 계속합니다.

잡스는 자신이 원하는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서 옮긴 팀의 팀장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때 잡스가 차지한 팀은 '백만 인을 위한 컴퓨터'라는 콘셉트로 개발 중이었던 매킨토시 개발팀이었습니다.

그는 이 팀에 유능한 인력을 끌어오기 위해서 애플 II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개발하고 있던 직원들을 새로 영입하는데 노력을 기울입니다.

원하는 인재들을 끌어모은 잡스는 그들에게 3년 계획이었던 매킨토시 개발을 1년 반 만에 끝내라고 압박합니다.

물론 이때 잡스를 믿고 따랐던 직원들도 물론 있었지만 다수의 직원들은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버겁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플 이사회는 잡스를 회사의 골칫덩이로 여기게 되었지만, 잡스는 굴하지 않고 개발에 성공해 마침내 1984년 세상에 없었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게 됩니다.

16. 스티브 잡스, 획기적인 마우스 기능과 다양한 서채기능을 탑재한 매킨토시 컴퓨터를 출시하다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

잡스는 어렵게 개발한 매킨토시의 등장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싶어 했고, 거액의 돈을 들여서 영화 '에이리언' 등으로 명성을 날린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광고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미식축구 대회 광고에 상영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잡스는 회사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IBM에 밀리는 상황에서 큰돈을 광고비로 지출하는 것을 회사에서는 원하지 않았던 것이며, 애플 이사회는 부랴부랴 광고를 취소하려고 했지만 방영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결국 예정대로 광고는 상영됩니다.

이 광고는 소설 1984를 모티브로 당시 경쟁자였던 IBM을 '악'에 비유하고 IBM에 지배당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 영웅 매킨토시가 등장해서 악을 깨부숨으로써 해방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한마디로 IBM 저격 광고였던 것이고, 이 광고에 무려 100만 달러 지금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8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광고만으로는 매킨토시의 특징을 알 수 없습니다.

최초로 마우스가 장착된 매킨토시 컴퓨터
최초로 마우스가 장착된 매킨토시 컴퓨터

매킨토시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사진인데, 이전 컴퓨터의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매킨토시의 가장 큰 차별점이자 장점은 바로 마우스였고, 이것을 통해 사용자들이 작업을 간편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기존에는 화면에 키보드로 문자를 입력해 사용했다면, 매킨토시는 마우스를 이용해 아이콘을 클릭해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쉽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탕화면, 스크롤바, 타이틀바 등이 모두 이때 탄생합니다.

잡스는 또 다른 기술을 하나 탑재하는데 바로 서체를 다양하게 한 것입니다.

다양한 서체 또한 매킨토시 개발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렇듯 매킨토시로 다양한 기술 변화가 생겼는데 이에 대해 대중들도 열광하며 1984년 1~5월 사이에 약 7만 대를 판매하는 데 성공합니다.

17. 매킨토시, 프로그램 호환성이 없고 높은 가격에 판매량이 급감하다 

하지만 곧 판매 부진을 면치 못하고 큰 손실이 일어났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실용적인 컴퓨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기술적으로 매킨토시가 완벽한 컴퓨터라고 생각한 잡스는 다른 프로그램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매킨토시 고유의 프로그램만 사용할 수 있었고 이는 호환성을 우선시한 IBM과 비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매킨토시의 결정적인 문제가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높은 가격이었습니다.

매킨토시는 출시 시점에 2,495달러였는데 현재 가치로 추산해 보면 약 950만 원 정도였습니다.

이는 1,565달러에 출시된 IBM사의 컴퓨터보다 약 1,000달러 정도나 비쌌던 것입니다.

또한 잡스는 미관상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쿨링팬을 제거해 버렸고, 조금만 사용해도 발열이 되어 사용하는데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잡스의 완벽주의가 매킨토시의 경쟁력을 떨어트린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매킨토시의 예상 판매량을 너무 높게 설정하는 바람에 막대한 재고까지 떠안게 됩니다.

18. 스티브 잡스, 본인이 세운 회사에서 퇴출당하다 

이렇게 애플은 회사의 재정문제가 심각해지자 회사의 미래를 위해 매킨토시 팀을 손봐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 이사회를 통해서 제기되었습니다.

존 스컬리
존 스컬리

당시 애플의 CEO였던 '존 스컬리'는 이사회를 통해 잡스를 이사회 회장직에게 해임하기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창업한 워즈니악은 1981년 비행기 사고로 뇌진탕에 의한 부분기억상실증을 앓았고 잠시 휴직한 후 회사로 돌아왔으나 회사의 분위기는 살벌함 그 자체였고 사내 정치나 경영보다는 개발에 집중하고 싶었던 그는 애플의 모든 주식을 팔고 사표를 내 잡스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1985년 잡스는 자신의 청춘을 모두 바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한순간에 IT업계의 스타에서 패배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19. 스티브 잡스, '토이스토리'의 성공으로 다시금 주식 부자로 거듭나다 

그리고 애플의 주식을 모두 판 잡스는 애플을 나온 다른 엔지니어들과 함께 '넥스트'사를 설립합니다.

잡스는 실패를 교훈 삼아 철저하게 시장분석을 하고 개발한 컴퓨터를 판매할 계획을 세밀하게 준비합니다.

이때 언론은 잡스의 새로운 제품을 기다렸지만 그는 3년간 어떠한 신제품도 내놓지 않고 개발에만 몰두했으며 마침내 1988년 넥스트사의 첫 신제품 넥스트컴퓨터를 출시합니다.

넥스트스텝이라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성능이다 보니 현재 가치 약 2,200만 원으로 너무 비싸 시장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위기에 빠진 잡스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오게 됩니다.

토이스토리
토이스토리

넥스트사 설립 1년 후 그래픽 회사 하나를 사들였는데 이곳에서 제작한  '토이스토리'라는 세계 최초 3D  장편 애니메이션이 대성공을 거두며 잡스의 숨통을 트여준 것입니다.

토이스토리는 할리우드의 컴퓨터 그래픽 시대를 연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잡스는 스타워즈를 만든 조지 루카스 감독이 이혼 소송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3D 편집과 특수효과 등 컴퓨터 그래픽에 특화된 루카스 그래픽스를 매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회사를 사들였고, 그곳이 바로 지금의 '픽사(PIXAAR)'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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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PIXAAR)의 스토리 작가가 알려주는 스토리텔링 법칙 22가지(1~6)

픽사(PIXAAR)의 스토리 작가가 알려주는 스토리텔링 법칙 22가지 픽사의 스토리보드로 일하고 있었던 엠마 코트라는 사람이 자기 트위터를 통해 공개한 내용입니다. 엠마 코트(Emma Coats)는 픽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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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PIXAAR)의 스토리 작가가 알려주는 스토리텔링 법칙 22가지(1~6)

픽사(PIXAAR)의 스토리 작가가 알려주는 스토리텔링 법칙 22가지 픽사의 스토리보드로 일하고 있었던 엠마 코트라는 사람이 자기 트위터를 통해 공개한 내용입니다. 엠마 코트(Emma Coats)는 픽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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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개발자인 잡스는 컴퓨터 그래픽에 관심을 보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에 큰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정말로 사고 싶었어요. 루카스 필름의 사람들을 봤을 때 그들이 예술과 기술을 결합하는 일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게 제가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분야이기도 합니다.

 

토이스토리는 놀라는 3D 그래픽 기술을 선보이며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전 세계에서 3억 6200만 달러, 현재 가치로 추산하면 약 9,923억 원의 수익을 거둬들이며 흥행에 성공합니다.

잡스는 토이스토리가 흥행할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 픽사사를 주식시장에 내놓기 위해 기업공개를 준비해놓고 있었습니다.

픽사사는 그동안 별다른 흥행 실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업 공개 시 성과는 미지수였기 때문에 회사의 재무 담당자는 1주에 14달러를 제안했는데 잡스는 22달에 내놓자고 했으나, 토이스토리의 성공으로 놀랍게도 공모 1시간 만에 주가가 49달러까지 치솟았고 이로 인해 잡스는 다시 12억 달러의 주식을 보유한 부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20. 스티브 잡스, 42살의 나이에 애플에 복귀하여 제품과 직원에 구조조정을 단행하다

그리고 이 시기 넥스트 컴퓨터의 실패로 파산 직전에 몰렸던 넥스트사에도 희망이 찾아옵니다.

바로 애플에서 잡스의 복귀를 요청한 것입니다.

잡스가 없는 애플은 특별하고 매력적인 제품을 개발하기보다는 구태의연한 경영전략으로 제품 개발과 관련 없는 옷을 판매하기도 하는 등 이익 창출에만 급급하는 회사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 부진은 계속되었고 게다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95가 출시되면서 혁신적인 소프트웨어인 윈도우를 탑재한 IBM의 컴퓨터가 인가를 끌자 적자를 면치 못하던 애플은 결국 1997년 9월 10억 4천만 달러, 현재 가치로 환산해서 3조 3천820억의 적자를 기록하고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파산까지 90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 애플은 윈도우 95에 대항하기 위한 운영체제로 잡스가 개발한 넥스트스텝이라는 운영체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잡스는 고민 끝에 1997년 12년 만인 42살의 나이에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 임시 CEO로 복귀하게 됩니다.

애플에 복귀하면서 잡스가 받은 연봉은 단돈 1달러로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그래서 잡스는 애플의 CEO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14년간 받은 연봉은 단 14달러뿐입니다.

사실은 책정된 연봉의 금액은 성과급 등 부가적인 금액을 제외한 것으로 잡스는 애플이 넥스트 컴퓨터를 사는 대가로 현금 약 1억 2천만 달러와 애플 주식 3억 7천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 후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합니다.

우리 제품 중 30%는 매우 훌륭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외 70%에 해당하는 제품들은 꽤 괜찮기는 하지만 우리가 굳이 생산할 필요가 없는 제품이었습니다. 

 

당시 애플은 '썩은 사과'라고 불릴 만큼 품질이 예전만 못했고 특히나 잡스가 없는 12년간 애플은 필요 없는 제품들을 쏟아내던 시기였습니다.

세상을 바꿀 제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한 가지에 몰입해야 한다

 

잡스는 불필요한 제품을 없애기로 결정하고 제품라인업을 축소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고 3,000명 이상이 해고됩니다.

 

가차 없는 잡스의 행동에 직원들은 잡스와의 만남을 꺼리게 됩니다.

특히 잡스 기피 장소 1순위는 바로 엘리베이터였습니다.

잡스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직원들에게 물었습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 뭐야? 하는 일은 회사에 도움이 되나? 된다면 어떤 도움이 되지?

 

잡스는 이때 직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하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 직원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해고야!

 

잡스는 면접 자리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인재가 아니면 무례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잡스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친절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우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실제 스티브 잡스의 장애인주차공간에 주차된 차량
실제 스티브 잡스의 장애인주차공간에 주차된 차량

뿐만 아니라 장애인전용주차공간에 무단주차 후 벌금을 피하기 위해서 번호판을 달지 않기도 했습니다.

리사 브레넌 잡스
리사 브레넌 잡스

잡스는 고등학생 때 사귀던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딸 '리사 브레넌 잡스'를 낳았었는데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기까지 했는데 그녀가 소송을 걸어서 친자 관계가 드러나자 그제야 딸로 인정을 하고 양육비를 지원해주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잡스부녀는 화해를 했고 잡스는 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는 했습니다.

21. 잡스의 첫 번째 혁신, 브랜딩

잡스는 비정한 워커홀릭의 면모로 느슨하고 방만하던 애플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애플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혁신에 도전합니다.

이때 잡스의 첫 번째 혁신은 바로 '브랜딩'입니다.

잡스는 애플의 망가진 이미지를 회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세우기 위해 슬로건을 만듭니다.

Think differant.
다르게 생각하라.

 

잡스가 만든 슬로건을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Think differant 슬로건을 담은 애플의 광고
Think differant 슬로건을 담은 애플의 광고

사람들은 광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다르게 생각하라'는 이 한 마디에 매혹되었습니다.

이 광고를 통해 잡스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하나의 제품이 아닌 애플만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슬로건을 만든 또 하나의 썰이 존재하는데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경쟁사인 IBM을 겨냥해서 만든 것이라는 썰입니다.

IBM의 슬로건과 애플의 슬로건
IBM의 슬로건과 애플의 슬로건

다름 아닌  IBM의 슬로건이 Think였고 ' IBM을 꺾고 애플이 1위를 탈환할 것이다'라는 의지를 담아서 만들었다는 것인데 잡스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썰입니다.

 

잡스는 회사와 제품의 이미지뿐 아니라 회사를 대표하는 잡스 자신의 이미지까지 새롭게 브랜딩 합니다.

잡스는 애플에 복귀하고 1년 후인 1998년부터 우리가 잡스 하면 떠오르는 검정 터틀넥, 청바지, 운동화 차림을 고수합니다.

잡스는 또한 단결을 위해 직원들에게 유니폼을 입히려고 했지만,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됩니다.

이세이 미야케
이세이 미야케

 

잡스의 검정 터틀넥 변천사
잡스의 검정 터틀넥 변천사

잡스가 이를 아쉬워하자 친분 있는 유명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잡스만을 위해 유니폼으로 수백 장의 검정 터틀넥을 만들어 준 것이며 이때부터 잡스는 똑같은 옷을 입게 됩니다.

잡스는 평소에도 검정 터틀넥을 입고 다녔고 이것이 예상하지 못한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잡스의 개성이 강조되면서 스스로가 애플이 단순하고 합리적인 브랜드라는 것을 강조한 잡스의 옷차림을 통해 애플의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광고 모델이 된 것입니다.

21. 잡스의 두 번째 혁신, 음악 시장의 개척

이처럼 잡스는 애플의 부활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가 시도한 혁신을 밑거름 삼아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엄청난 역작을 만들어 냅니다.

애플을 창업한 후인 1980년대 초반 도쿄를 방문한 잡스는 그곳에서 놀라운 풍경을 목격합니다.

일본인들이 헤드폰과 연결된 휴대용 플레이어를 들고 걸어 다니면서 음악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일상엔 이미 변화가 시작됐다

그는 수많은 음악을 작은 기기에 담아서 듣는 것을 상상해 왔는데 그 상상이 일본에서 현실로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 애플에 복귀한 잡스는 어떤 컴퓨터를 개발했을까?라고 세간의 관심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아이템을 발표하게 되었고,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킵니다.

잡스의 두 번째 혁신은 바로 음악 시장의 개척입니다.

아이팟
아이팟

음악 시장의 판도를 바꾸며 심플하고 예쁜 디자인을 앞세운 '아이팟'을 출시한 것입니다.

사실상 당시에 이미 MP3가 출시되어 있었는데 왜 아이팟이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음악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혁신의 중심에는 아이팟과 함께 출시된 애플의 독자적인 음악 서비스 스토어인 '아이튠즈'가 있었습니다.

아이튠즈에서는 한 곡에 99센트로 노래를 구입해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워크맨 시대에는 카세트테이프나 CD를 구입해야 했고 MP3 시대에는 인터넷에서 음악을 다운로드해서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법 복제품, 불법 다운로드가 성행했고 이 때문에 음악 시장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늘 비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플은 음악 스토어를 통해 음악을 구입하고 소비하는 새로운 온라인 음악 생태계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처음 출시된 1세대 아이팟은 얇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를 탑재해 무려 1,000곡의 노래를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잡스는 아이팟과 아이튠즈를 통해 성공적인 복귀를 알림과 동시에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발휘하게 됩니다.

애플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제품이 있다면 바로 아이팟이다. 애플의 놀라운 기술과 전무후무한 사용 편의성, 근사한 디자인이 결합된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이다. 누군가 애플이 왜 지구상에 존재하는지 궁금해한다면 나는 아이팟을 보여줄 것이다.


22. 잡스의 세 번째 혁신, 인터넷의 혁신

그리고 마침내 2007년 잡스는 

21세기를 창조한 신

내 손안의 PC&#44; 아이폰
내 손안의 PC, 아이폰

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획기적인 제품을 출시하는데 바로 세상에 없던 휴대폰을 발명해 내는데, 세상에 없었던 휴대폰인  '아이폰'입니다.

아이폰이 공개되자 전 세계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지금 구매할 수 있는 최고의 전화기라면서 아이폰의 등장에 환호했습니다.

22. 1 아이폰의 차별적인 기술 ① 디자인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이폰만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한 기술에 있었는데 먼저 살펴볼 것은 바로 '디자인'입니다.

폴더폰, 슬라이드폰 등 당시만 해도 휴대폰에는 숫자와 문자를 누를 수 있는 키보드가 존재해, 화면의 반 정도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폰은 키보드가 없는 터치스크린으로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인 것입니다.

 또한 배터리를 갈아 끼울 필요가 없는 일체형으로 적용해 잡스가 추구하는 얇고 가볍고 심플한 디자인을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22. 2 아이폰의 차별적인 기술 ② 애플리케이션

아이폰을 파격적인 아이템으로 인식시킨 또 하나의 기술은 바로 간편해진 '애플리케이션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컴퓨터에서 했던 문서 관리나 게임 등을 휴대폰으로 손쉽게 걸어 다니면서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당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독보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 바로 '소셜 미디어', 즉 'SNS'입니다.

이모지
이모지

이모지를 처음 개발한 것은 일본이었는데 소프트뱅크의 창업자 손정의가 일본시장에서 성공하려면 문자 메시지에 이모지를 넣으라고 잡스에게 제안했습니다.

잡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2008년 아이폰 3G가 출시될 때 이모지 기능을 탑재합니다.

이후 SNS의 바람을 타고 잡스와 애플의 이모지는 천 마디 말보다 하나의 이모지로 소통하는 유행을 선도하게 됩니다.

23. 아이폰, 또 다른 혁신 '팬 문화'를 만들다

아이폰은 독자적인 기술로 스마트 혁명을 일으키며 이 전에 없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내는데 바로 '마니아', 즉 '팬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아이폰을 사기 위해서 오픈런은 물론이고 길게 줄을 서 기다리는 일들이 생기게 되며 브랜드의 '팬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아이폰은 업그레이드 버전이 출시될 때마다 애플 스토어 앞에 엄청난 줄이 이어지고 긴 기다림 끝에 아이폰을 구매한 소비자들은 아주 행복해합니다.

아이폰의 팬 문화는 세대를 초월하고 세대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첨단 기계 문명의 시대에 기계와 인간의 감성적 교감이 그저 놀라울 뿐이며, 잡스는 이 점에서 인류에게 최고의 유산을 남긴 셈입니다.

우리는 기술만으론 부족했다. 그래서 기술에 인문학과 인간성을 결혼시켰다. 기술과 인묵학이 만나니 비로소 고객의 심장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애플은 고객의 마음을 홀리는 또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휴대폰을 샀을 뿐인데 영웅이 된 것처럼 매장에 있는 모든 직원들이 환호와 박수를 쳐줍니다.

이후 2010년에는 아이패드를 발표하며 매년 발전과 혁신을 선보였고, 그 결과 2011년 전 세계 시가총액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잡스는 이렇듯 인생의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끝내 세상을 바꾸는 혁신을 이뤄내게 됩니다.

24. 스티브 잡스, 췌장암은 끝내 극복하지 못하다 

하지만 이런 잡스가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췌장암'입니다.

잡스는 2003년 10월, 처음 췌장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자세한 병세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79kg의 몸무게가 59kg까지 줄어든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면서 큰 우려와 걱정이 이어졌습니다.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수술을 거부했고, 대신 채식과 단식을 하고 대체의학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암 진단 9개월 만인 2004년 7월, 종양이 더욱 커져서 수술을 받게 되지만 이미 간으로 전이가 진행된 상태라 완치가 불가능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잡스는 죽기 전날까지도 현 애플의 CEO인 팀 쿡과 만나 새로운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일을 놓지 않았던 잡스는 2011년 끝내 56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맙니다.

잡스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에 전 세계 팬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졌고 언론에서는 그의 죽음을 기리며 만평을 쏟아냈습니다.

스티브 잡스 사후 그를 기리는 만평
스티브 잡스 사후 그를 기리는 만평

스티브 잡스 사후 그를 기리는 만평

그중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역사를 바꾼 혁신가라고 불린 '에디슨'과 인사를 하는 만평을 통해 미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반겨주는 모습에서 잡스 역시 한 시대를 변화시킨 대단한 인물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잡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테크놀로지' 혁신 그 자체보다는 '인간 정신에 대한 확신'이라고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준 잡스의 다음 연설을 통해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어떤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하라. 현실에 안주하지 마라)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췌장암

 

가장 무서운 암! 췌장암에 관한 모든 것 알아보아요.

1. 많은 종류의 암 중에서 가장 무서운 암은? 두말할 필요 없이 췌장암입니다. 췌장암은 사실은 아직까지도 불치병에 가까운 암입니다. 2기여도 5년 생존율이 20%밖에 되지 않습니다. 빨리 발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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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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