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 희대의 '악녀'였을까? '위대한 통치자' 였을까?(2)
26. 측천무후, 스스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다
측천무후가 처음부터 어떤 마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로 이 즈음 측천무후는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꿈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자가 황제가 된 다는 것은 중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30년 가까이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온 측천무후로서도 섣불리 실행할 수 없었던 꿈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자신의 황위 계승을 정당화하려는 작업을 진행하게 됩니다.
우선 측천무후 집안인 '무씨' 가문을 당나라 최고의 집안으로 승격시켰습니다.
하지만 측천무후가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행보는 조정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심지어 측천무후의 편이 되어주었던 신하들조차도 하나둘 등을 돌리게 됩니다.
27. 측천무후, 자신에 저항하는 '서경업의 난'에도 이미 예상한 일이라 두렵지 않아 하다
그런데 바로 이때,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684년 9월, 중국 양저우에서 '서경업'이라는 관리를 중심으로 해서 무려 10만 명의 군대가 모인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서경업의 난'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측천무후가 계속 섭정을 하는 등 권력을 거머쥐려 하자 서경업을 중심으로 폐위된 당 중종을 황제로 복권할 것을 주장하며 일으킨 난입니다.
서경업이라는 사람은 그동안 측천무후를 지지해 온 고위대신의 손자였습니다.
그런 측천무후에 대해서 가족은 물론 황제와 황후까지 끔찍하게 죽인 천하의 악녀라고 비난하는 글을 전국 배포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사악한 무리와 가까이하며 충신과 인재를 해치고 형제자매를 도살하였으며 군주와 황후를 시해하였다. 이에 정의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어 이 요망한 자를 척결하려고 한다'
<대이경업적격천하문>
측천무후에 대한 살벌한 내용의 격문을 서경업이 배포했던 것입니다.
이 글은 측천무후에게 보고 됐는데 측천무후는 자신에 대한 적나라한 비난의 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웃음을 보였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이미 반역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28. 측천무후, 황제가 되기 위한 전략 1. 반란 제거
측천무후는 한발 한발 황제가 되어가는 단계를 닮아가기로 합니다.
측천무후는 즉각 반란군의 3배나 되는 30만 명의 군대를 보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해 버립니다.
29. 측천무후, 황제가 되기 위한 전략 2. 밀고 장려
하지만 이후에도 전국에서 반란에 대한 음모는 끊이지 않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강력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반역자로 규정하고 반역자를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서 공포정지를 폈습니다.
이때 아주 유용하게 쓴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몰래 서로를 고발하게 하는 '밀고(密告. 빽빽할 밀, 고할 고)'입니다.
측천무후는 사람들이 한층 더 밀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24시간 밀고를 할 수 있는 '함'까지 만들어서 전국에 미치하게 합니다.
'동궤(銅匭)'라고 불리는 이 함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구멍이 있는 투서함으로 투서의 종류에 따라 넣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동쪽은 인재를 추천하는 일, 남쪽은 조정에 대한 건의사항, 서쪽은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 그리고 마지막 북쪽에 밀고용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 동궤를 이용하는 백성들이 있었을까요?
동궤가 설치되자 밀고가 사방에서 빗발치게 됩니다.
<자치통감>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측천무후는 밀고자가 농부이든 나무꾼이든 모두 만나주었다. 밀고한 말이 마음에 들면 관직을 내렸고 사실이 아니어도 문책하지 않았다'
<자치통감 中>
밀고를 해서 반역자를 잡는데 도움이 되면 관직을 받을 수 있었고 또 반역자가 아닌 자를 밀고하였어도 그 죄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밀고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측천무후는 밀고를 위해서 특별한 관리들을 임명했습니다.
이들을 통칭해서 '혹리(酷吏)'라고 했으며 이들은 '아주 가혹한 형벌을 집행하는 아주 무서운 관리'라는 뜻입니다.
혹리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밀고를 접수했고 모반을 도모하는 관리들을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자치통감> 기록에 따르면 밀고당한 사람들은 당시 비밀 감옥까지 만들어서 밤낮으로 고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혹리들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아주 끔찍한 고문을 계속했습니다.
당시 새로운 고문 기구만 10가지 넘게 발명했고 형벌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나직경(羅織經)'이라는 책을 엮기까지 했습니다.
나직경에는 밀고하는 방법과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만드는 방법 및 고문 기술 등이 쓰여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큰 형벌 중의 하나가 큰 항아리 안에 사람을 넣은 채, 불을 지펴서 쳐 죽이는 고문이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고문이 있었는데 이때도 갈비뼈를 한 대씩 부러뜨리며 고통을 극대화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손톱에 바늘을 하나씩 찌르기까지 했습니다.
이러듯 고문 방법이 너무 잔혹하다 보니 허위 자백을 하게 되고 고문받던 중 심지어 죽여달라 애원을 하기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당나라 황실 족보에 올라 있던 주요 가문들이 상당수 멸족당할 정도로 대숙청이 진행됩니다.
이렇게 참혹한 숙청이 몇 년씩 이어지다 보니 반란을 꾀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30. 측천무후, 황제가 되기 위한 전략 3. 신격화
하지만 반대파를 아무리 죽여도 측천무후는 황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여성인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기 위한 명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측천무후에게는 여자가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근거가 아주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교, 도교경전을 샅샅이 뒤져도 여자가 황제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작은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측천무후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동안 한 신하가 강에서 주었다며 하얀 돌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거기에 측천무후가 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결정적인 명분이 적혀있었는데 과연 뭐라고 적혀 있었던 것일까요?
'성모가 세상에 나타나 제왕의 업을 길이 번창케 하리라'
이런 예언이 적힌 돌이 기적처럼 나타난 배경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 사건은 모두 측천무후의 조카가 꾸민 연극이자 계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천무후는 이 돌을 받고 몹시 기뻐하며 크게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돌에 쓰인 '성모'라는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칭을 '성모신황'으로 바꾸고 문무백관과 백성들을 '뤄양'으로 불러 하늘에 성대한 제사를 지냅니다.
이렇게 측천무후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신격화합니다.
31. 측천무후, 황제가 되기 위한 전략 4. 자신이 '미륵불'의 환생이라며 불교를 적극 활용
측천무후는 또 한 가지를 이용하는데 바로 '불교'였습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불교가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측천무후가 '대운경'이라는 새로운 불교경전을 만듭니다.
그리고 경전 안에 여자 황제에 대한 예언을 새롭게 넣습니다.
'천녀는 중생을 위하여 여자의 몸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때 신하들은 이 여인을 받들어 계속 왕위를 이어갈 것이고 여성이 왕위를 계승하여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
<대운경 中>
그러자 측천무후의 측근들은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측천무후가 바로 미륵불의 환생이다'
미륵불이라는 것은 불교에서 세상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측천무후가 바로 그 부처라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부처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또 어떤 것을 이용했을까요?
측천무후는 전국에 절들과 불상들을 건축했습니다.
특히 낙양에 '룽먼석굴'이라는 돌로 만든 석굴, 불상을 세우게 됩니다.
수많은 석굴 사이 가장 크고 위엄 있는 것이 '노사다 대불'인데 이 대불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이 노사다 대불의 얼굴이 측천무후를 본떠서 만들었으며 그래서 측천무후와 대불이 닮았다는 전설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격화를 통해 민심이 측천무후 편으로 돌아서면서 문무백관과 수만 명의 백성들이 궁궐 앞에 모여들어 측천무후에게 황제가 되어 달라고 청원운동까지 벌였다고 합니다.
32. 측천무후, 황제에 등극하며 '주나라'로 나라 이름을 바꾸다
그리고 690년 9월, 화창한 가을날 드디어 측천무후는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렇게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가 됩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무씨가 새 왕조를 여나니 덕으로 천명을 이행하고 백성을 교화할지어다. 이를 만천하에 공포한다!'
측천무후는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황제의 꿈을 이루고야 맙니다.
당나라는 여황제가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당시 67세에 황제가 된, 측천무후의 정식칭호는 '측천금륜대성신황제'입니다.
이를 줄여 '성신황제'라고 불렸습니다.
당시 평균 수명이 대략 60세 정도였는데 측천무후는 67세라는 엄청난 고령으로 자신의 꿈인 황제에 등극하며 꿈을 이룬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황제로 즉위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당(唐)'나라에서 '주(周)'나라로 변경합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성씨인 '무씨'가 고대 주나라 왕족의 후예인 것을 알고는 이를 근거로 자신이 주나라 왕조를 계승한다고 하는 명분으로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씨' 였던 아들들의 성도 '무씨'도 개명을 해버립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신라여왕3
33. 측천무후, 과거 시험을 통한 인재 등용에 힘쓰다
그렇다면 그토록 바라던 황제에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는 어떤 황제가 되었을까요?
이미 수십 년간 남편 '당 고종'을 대신해서 당 제국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었던 측천무후는 스스로 세운 주나라에서도 황제의 역할을 누구보다 더 잘해나갔습니다.
측천무후가 이때 나라를 잘 다스린 비법 중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최고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파격적인 '인재 등용'입니다.
당 태종까지만 해도 혈통이나 가문에 따라서 관직을 얻는 경우가 많았는데 측천무후는 신분, 지위, 출신에 관계없이 실력만으로 사람을 뽑아서 중요한 관직에 앉혔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재 등용은 특정 집단에 권력 세습을 막는데도 아주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과거 시험을 통한 인재 등용을 늘리고 관리들에게 적극적으로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았습니다.
이렇듯 측천무후 시대에는 전국에서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측천무후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과거시험을 통해서 조정에 들어온 이들이 관리는 약 630여 명, 재상이 11명으로 이전 시기인 당 고종과 태종 때를 모두 합한 숫자보다도 약 2~3배나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 인재들이 측천무후와 함께 주나라의 황금기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측천무후에게 다소 비판적인 당나라의 역사서에서도 이런 업적을 인정하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 측천무후는 인재 선발에 힘썼다. 등용의 문을 활짝 열어 기탄없이 인재를 등용하며 계속 훌륭한 인재를 찾았다'
<구당서 139권 中>
'광직에 맞지 않게 무능한 자가 있으면 모두 찾아내 관직을 삭탈하고 대신 그 자리에는 정말로 현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자를 임명했다'
<신당서 中>
측천무후는 이런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아 안으로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국경을 튼튼히 다져나갔던 것입니다.
34. 측천무후, 주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루다
측천무후 시기에는 궁궐 안에서는 피바람이 불었지만 궁궐 밖의 백성들의 삶은 더 나아졌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는지 여부에 대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보통 가구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 고종 초기인 652년 경에는 385만 호였던 가구수가 측천무후 치세인 705년 경이되면 약 600만 호를 넘겨 단 50년 사이에 가구 수가 2배 가까이 늘어난 것입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경제가 전반적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측천무후의 다양한 장려정책 덕분에 농업은 물론 상업, 수공업, 교통이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역사에서는 측천무후가 나라를 다스리는 이 시기를 두고 당 태종의 치세에 버금간다고 높이 평가하며 '무주의 치' 즉 '무측천이 다스리는 주나라의 치세'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측천무후가 만든 주나라의 태평성대라 할 수 있겠으며 측천무후는 위대한 여황제로서의 면모를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가 역사상 엇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5. 측천무후, 공포정치를 그만두다
이렇게 새롭게 세운 주나라가 점차 번성하자 측천무후는 이제 더 이상 공포로 나라를 다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공포정치를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까지 자신의 명을 받아서 밀고와 고문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던 관리인 '혹리'들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혹리들을 제거하거나 관직을 박탈하거나 죽여버립니다.
반대로 혹리들에게 억울하게 고통받은 백성들을 복권시켜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측천무후가 민심을 읽고 영리하게 대처한 것입니다.
아마도 측천무후는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전설상의 위대한 성현들처럼 성군이 되려는 꿈을 꿨던 것으로 보입니다.
36. 측천무후, 건강 유지를 위해 젊은 남자들 '남총' 성생활을 즐기다
측천무후는 67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천하를 더 누리기 위해서는 각별히 신경 썼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건강유지였습니다.
이를 위해 측천무후는 우선 도가의 수련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안정시켰습니다.
특히 젊은 남자를 가까이 두고 성생활을 하면 젊음을 회복할 수 있다는 도교의 '양생술'을 믿게 됩니다.
이에 측천무후에게도 특별히 총애하는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통 '남총'이라고 불렀습니다.
측천무후의 첫 번째 남총으로 알려진 인물은 '풍소보'라는 사람인 그는 도시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출신으로 몸이 아주 단단하고 건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측천무후는 풍소보가 너무 맘에 든 나머지 그의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서 이름을 '설회의'라고 개명시키고 나중에는 '대장군'이라는 관직까지 내려줍니다.
풍소보는 측천무후의 침소를 드나들며 시중을 하였고 측천무후의 큰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측천무후의 남총 사랑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꼈던 사람은 측천무후의 나이가 73살이 되던 해에 만난 장 씨 성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장 씨 형제들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얼굴이 연꽃처럼 아름다운 데다 가지고 있는 재주 또한 빼어났습니다.
피리와 비파를 신들린 듯이 뛰어나게 연주했고 춤 솜씨까지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이들을 남총으로 삼아서 여러 벼슬도 내리고 침실 수발까지 들도록 했습니다.
37. 측천무후, 잘생긴 남자들을 모으는 전문 관청인 '공학감'까지 만들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잘생긴 남자들을 모으는 전문 관청인 '공학감'까지 만들었습니다.
장 씨 형제 중에서 형을 수장으로 임명해서 각지에서 미소년들을 선발하도록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천하의 남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남자들은 측천무후의 눈에 들기 위해서 공학감에 서로 들어오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자신이 얼마나 남자다운지 혹은 미모가 뛰어난지를 과시했고 합니다.
풍문에 의하면 측천무후가 하룻밤을 함께 보낸 남자의 수가 3천여 명에 달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시 당나라의 남자 황제들의 경우에도 후궁만 121명을 거느렸고 심지어 양귀비의 남편 '당 현종' 때에는 궁녀만 4만 명에 달했었으니 단지 측천무후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남자를 거느렸다 하며 비난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로 보입니다.
그런데 불로장생을 위한 도가의 양생술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요?
전해져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측천무후는 장 씨 형제와 같이 지낸 덕분에 젊어졌다고 느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태후의 춘추가 높았지만 단장을 잘해서 주변 사람들조차도 태후가 노쇠했다는 걸 닫지 못했다'
<자치통감 中>
<자치통감>에 따르면 측천무후의 나이가 70대에 이르렀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나이가 이 정도로 많았는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젊은 상태를 유지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38. 측천무후, 건강에 좋은 음식을 챙겨 먹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건강한 삶을 위해서 옛날부터 여성에게 좋다고 알려진 '익모초'를 달여서 먹기도 했고 건강을 위해 채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가 가장 즐겨 먹었던 음식 중 '가연채(무단옌차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를 국수처럼 얇게 썰어서 접시에 놓고 각종 채소와 고기를 채를 그 위에 올리고 여기에 육수를 부어 국수처럼 먹는 음식입니다.
39. 측천무후, '신룡정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남총에 빠질수록 탄탄했던 측천무후에 대한 지지에는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총애를 받던 장 씨 형제는 측천무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청치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태후가 연로해지면서 정사를 주로 장 씨 형제에게 위임했다'
<자치통감 中>
<자치통감> 기록에 따르면 측천무후가 나이가 들면서 측천무후 치세 말기에는 정사를 두 형제에게 완전히 맡겼다고 합니다.
결국 남총문제는 측천무를 위협하는 독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측천무후가 82세가 되던 705년, 그녀가 중병이 들어 몸져눕게 되자 기회를 노린 몇몇 재상들이 측천무후의 두 아들 이철, 이단을 앞세워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룡정변'으로 측천무후의 폐단에 대한 신료들의 불만으로 재상들이 일으킨 병변입니다.
이때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간악한 장 씨 형제가 반역을 일으켜서 그것을 진압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궁으로 쳐들어 온 쿠데타 세력은 장 씨 형제의 목을 베서 시신을 내다 건 뒤에 당당히 측천무후의 처소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측천무후에게 황위를 빨리 아들들에게 물려주라고 요구합니다.
과연 일평생 권력을 좇던 측천무후는 이 요구를 따랐을까요?
측천무후는 이미 손을 쓰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하고 자신 손으로 내쫓았던 셋째 아들 '당 중종 이철'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그러자 황제가 된 이철은 나라의 이름을 주나라에서 다시 당나라로 바꿉니다.
이렇게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황제가 다스렸던 주나라는 이제 1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40. 측천무후,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로 낮추어 부르라 유언을 남기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다
반란 이후 조용히 물러나 궁궐에서 칩거하던 측천무후는 그 해 어느 추운 겨울날, 유언 하나를 남기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를 황제라 칭하지 말고 측천대성황후로 부르라...(중략) 왕 황후, 소 숙비 두 집안과 화를 입은 사람들의 성씨와 관직을 복권하라'
측천무후는 왜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로 낮춰 부르라 한 것일까요?
측천무후는 훗날 자신을 둘러싸고 조정에서 피바람이 불 갈등의 소지를 미리 없애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측천무후는 다신이 다스렸었고 앞으로 아들이 다스릴 당나라가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발전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41. 측천무후, '악녀'라는 이미지에 감춰진 '위대한 통치자'로서의 여황제의 면모를 재평가하기 시작하다
그리고 측천무후의 능 앞에는 높이 8m에 달하는 거대한 비석이 세워졌는데 이 비석에는 어떤 글이 새겨져 있을까요?
측천무후의 능 앞 비석에는 아무 내용도 쓰여 있지 않아 이를 '백비(白碑)'라고도 합니다.
비석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첫 번째 추측은 측천무후가 수많은 목숨뿐 아니라 친자식들까지 죽였다는 수많은 악행이 기록될까 봐 두려워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추측도 있는데 비석에 기록하기에는 측천무후의 업적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비워뒀다는 설도 있습니다.
지난 1000여 년간 대부분의 역사서는 측천무후를 향해서 온갖 비난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역대 중국 황제 중에 유일한 여황제이자 위대한 통치자로서 측천무후는 새롭게 재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측천무후가 중국 역사상 얼마나 큰 업적과 공을 세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측천무후1